영화, 나폴레옹
개인적으로 호아킨 피닉스 주연에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라 매우 기대를 하고 보았습니다만,
영화 나폴레옹은 생각만큼, 어그로만큼, 기대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10점만점에 6점 정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유는 좀 지루했던 것 같습니다.
https://tv.naver.com/v/43697768
나폴레옹의 영웅적이고, 전략적인 면보다는 정치적 야망과 불안, 공포, 콤플렉스에 집중하는 거 같았습니다.
60년대 클래식한 서사극을 보는듯한 느낌이랄까?
새롭거나 현대적이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왜 한류가 뜨는지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어쩌면 새로운 맛이없다라는 표현이 맞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서라운드가 미친거 같아요. 보신다면, 아이맥스도 좋지만, 돌비관에서 관람하시길 추천드립니다.
여기서 역사적인 관점으로 더 파고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69년 8월 15일에 태어났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였습니다. 그는 코르시카 섬의 하급 귀족 가문 출신의 군인으로, 프랑스혁명 시기에 벌어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의 프랑스 육군은 효율적으로 조직된 군대로 평가되었으며, 그가 남긴 나폴레옹 법전은 전 세계의 민법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관계는 복잡했습니다.
조세핀은 원래 프랑스의 장군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의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프랑스 혁명 기간 중 반혁명분자로 처형되고, 조세핀은 총재정부의 주역인 바라스의 정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라스가 주최한 사교 모임에서 조세핀과 나폴레옹은 만나게 되고, 나폴레옹은 그녀에게 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1796년에 결혼했습니다.
조세핀은 나폴레옹이 군대의 계급을 올라가며 1804년에 황제가 될 때까지 14년 동안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사랑, 불륜, 정치적 이슈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조세핀은 서로에게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1795년에 처음 만났고, 1796년에 결혼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이 결혼은 미친 듯한 열정의 행동이었지만, 조세핀에게는 이혼한 여성으로서 그녀의 지위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이성적인 결혼이었습니다.
조세핀은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가 되기 전부터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1763년에 태어나서 1814년까지 살았으며, 1804년부터 1810년까지 프랑스의 황제였습니다. 이 정보들을 바탕으로 보면, 나폴레옹은 확실히 영웅이었지만, 그가 조세핀의 남자로서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그의 개인적인 욕구와 국가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정들이 항상 올바른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도덕적인 판단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복잡한 남자관계는 결혼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이에 격분한 나폴레옹도 맞바람을 피우는 가운데, 조세핀이 후손을 낳을 수 없자, 둘은 결국 1810년에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이 영웅이긴 했지만, 그가 조세핀의 남자로서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그의 개인적인 욕구와 국가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의 주요 전쟁 승리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년):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했습니다.
-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1806년): 프랑스가 프로이센 왕국을 패배시켰습니다.
- 프리틀란트 전투(1807년): 러시아 제국군이 패배했습니다.
- 바그람 전투(1809년): 연합군이 패배했습니다.
-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결정적으로 패배했지만, 이전에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전생 승리는 나폴레옹이 프랑스 제1공화국을 다시리는 동안 안정적인 재정을 확보하고 강력한 관료체제를 만들며 잘 훈련된 군대를 육성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연합국에게 패배한 후,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의 군사, 정치가, 제국주의자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업적 및 장점
나폴레옹 법전: 나폴레옹은 법전을 만들어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과 법 앞에서 만인의 평등, 농노제의 폐지, 종교 선택의 자유, 양심의 자유, 재산권의 보장 등을 실시하여 대부분의 나라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군사적 업적: 그는 이탈리아, 이집트 등에서 승리를 거두며 프랑스의 군사적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그의 프랑스 육군은 효율적으로 조직된 군대로 평가되었습니다.
능력에 따른 등용: 가문이나 혈연이 아닌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관료제의 확립으로 국민적 화합을 꾀했습니다.
부동산 등기 체제 확립: 나폴레옹 지적법을 제정하여 토지측량 및 관리 체제를 확립하여 근현대적인 지적측량 및 부동산 등기 체제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교육제도 확립: 도시를 새로이 일으키고 획기적인 교육제도를 확립하였습니다.
단점
대륙봉쇄령: 1806년에 나폴레옹이 내린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야기된 물자부족과 생필품 부족은 유럽 민중들을 고통스럽게 하여 반나폴레옹 감정을 고조시켰습니다.
전쟁의 희생자: 그 어떠한 명분이든 전쟁을 통해 300만에서 600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점은 나폴레옹의 과오라고 지적됩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혁명으로 폐지된 노예제를 부활시켰고 여성에 대한 차별적 조항을 법전에 넣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가치 무시: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의 가치, 즉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무시하고 황제에 취임해 시대정신을 퇴보시켰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업적과 장단점을 통해 나폴레옹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4줄 평
1. 영화는 생각보다 지루하다.
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혁명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프랑스 제1공화국을 세우며 국민의 영웅이다.
3. 그의 군사적 업적과 효율적인 군대 조직, 그리고 나폴레옹 법전 등은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그의 인간성과 도덕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4. 특히, 그의 복잡한 사랑 이야기와 그에 따른 개인적인 욕구와 국가의 이익 사이에서의 균형 잡기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한편, 그의 행동이 항상 올바르지 않았다.
'일상 > 드라마, 영화 속 역사적 배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시대의 정치적 분열과 화합 (0) | 2023.11.16 |
---|---|
신군부 세력의 반란 (0) | 2023.11.15 |
고려거란전쟁에 대해서 알아보자 (0) | 2023.11.14 |